메이저리그 경쟁적 균형 유지 정책 1편 - 드래프트 픽 제도
메이저리그에선 고정된 1위가 없습니다. 2014 시즌만 봐도, 매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밀리던 캔자스 시티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게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강호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제치고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올해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꼴찌를 차지했던 시카고 컵스는 오히려 내년이 기대되는 팀으로 촉망받고 있습니다.
위에 예시들 외에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하위팀이 영원히 우승에 도전하지 못한다거나 1강 체제가 몇 년간 유지되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요소에는 매우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구단의 자본력, 감독의 영향, 우수한 스카우터 보유 등이 있겠지만 필자는 팀들간의 전력균형 유지 정책도 한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드래프트 픽 제도
해마다, 수 많은 아마추어 선수 혹은 유망주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선수들의 관한 정보는 각 구단의 스카우터들이 이미 지니고 있겠지요. 훌륭한 유망주들은 당연히 메이저리그 팀들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팀들은 이 선수들을 '자본'으로 가져갈 수 없고, 또한 선수들은 자기 마음대로 팀을 고를수도 없습니다. 미래의 꿈나무들은 메이저리그 팀들간의 전력 균형을 위해 '분배'가 됩니다. 정규리그 승률 최하위 팀 순서대로 유망주 우선 선택권을 쥐어주는 방식의 분배가 진행되는데, 이것이 바로 드래프트(Major League Baseball Draft) 제도입니다.
미국시간 2013년 6월 6일에 열린 2013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30개 팀이 한 자리에 모여 신인 선수를 지명한다.
가령, 이번 2014시즌을 살펴봅시다. 30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9위가 콜로라도 로키스, 28위가 텍사스 레인저스였습니다. 그러면, 첫번째로 유망주 1명을 고를 수 있게 된 팀이 바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망주를 뽑겠죠. 그 다음에는 텍사스 레인저스..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승률 1위를 차지한 LA 에인절스가 30번째로 선수 1명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30개 팀이 1명씩 선택을 다 했다면, 드래프트 1라운드가 끝났다고 표현을 합니다. 1라운드가 끝났으므로,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2라운드 1픽도 역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가져갈 것입니다. 2라운드 2픽은 콜로라도 로키스, 2라운드 3픽은 텍사스 레인저스가 가져가겠습니다. 2라운드 30픽은 LA 에인절스가 가져가겠지요. 이렇게 1000명이 넘는 유망주 들을 30개 팀들이 나누어 가지는데, 하위 팀부터 좋은 유망주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이들이 미래의 강팀이 될 가능성은 커집니다. 이렇게 팀 간의 전력 균형을 만드는 것이 드래프트 제도 입니다.
이번 시즌 AL 동부 우승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이 제도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 됩니다. 벅 쇼왈터가 오리올스의 감독이 되고나서, 꼴찌였던 오리올스가 감독 지시 아래 좋은 유망주들을 픽하게 되었고 좋은 팜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오리올스 팜 선수들이 현역 메이저리거가 되었고 이들은 2014 AL 동부 우승의 주역이 되었죠.
그렇다면,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픽의 시초를 살펴보겠습니다.
1921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는 ‘드래프트’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아마추어 선수를 데려가기 위한 구실 혹은 계약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후에 NFL, NBA가 1936, 1946년에 이를 따라하기 시작하지만, 이 제도에 대해서 논란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초기에 존재하던 드래프트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자유롭게 팀들과 계약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이 많은 세인트루이스나 뉴욕 양키스 같은 팀이 훌륭한 유망주들을 싹쓸이하게 되었고, 이는 오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됨에 따라, 1947년에 메이저리그 제도로 ‘The Bonus Rule’이라는 제도가 생성됩니다. 이 제도는 선수들의 연봉(계약금)을 삭감시키고, 부자 구단들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아마추어 선수와 4000달러 규모 이상의 계약을 한 팀들은(그 당시 4000달러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그 계약에 협의한 선수들을 마이너리그 소속으로 둘 수 없게 되는 조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약이 2년이 지나면, 그 계약에 합의한 선수들은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갈 수 있었습니다. 2년이 지나기 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없다면 그 선수는 FA로 풀리게 됩니다.
‘The Bonus Rule’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는 팀들이 이 제도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2개의 사건 때문인데요, 첫 번째 사건은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현재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Clete Boyer 선수와 계약 후 2년 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시키다가, 그 시간이 지나자 바로 양키스로 트레이드 시켰던 일입니다. 트레이드 되기 2년 전, 양키스가 이미 가득찬 로스터에 Boyer를 등록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이 선수를 지켜줄 구단이 필요했습니다. 그 구단이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 였습니다. 어슬레틱스와 Boyer의 계약이 진행되고, 2년이 지나 이 선수는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었고 언제든지 콜업도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는 Boyer를 양키스로 넘깁니다. 양키스는 Boyer를 마이너, 메이저 모든 로스터에 등록할 수 있게 되었고 팀의 Depth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양키스가 어슬레틱스를 팜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는 다른 팀들의 항의가 들어왔고, 실제로 대리 계약을 한 것이라고 어슬레틱스는 시인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LA다저스가 아마추어 선수인 Rick Reichardt와 계약한 사건인데, 아마추어에게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계약을 했습니다. 입찰 경쟁에서 승리한 그 가격은 20만 달러였고, 그 스케일로 인해 구단들의 드래프트 제도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August Anheuser "Gussie" Busch, Jr, 마지막까지 반대표를 누른 팀의 구단주 in 1965
드래프트는 이렇게 여러 논란을 거치게 되고, 심지어 여러 청문회도 거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1964년에 이를 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윈터미팅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현재 시행되고 있는 드래프트의 모습으로 바꾸자는 움직임 말이죠. 그런데, 이는 당연히 부자 구단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니니 드래프트 제도 개정 투표에서 다저스, 양키스, 카디널스, 메츠가 반대를 누릅니다. 당시 양키스의 책임자 Johnny Johnson은 개정된 제도에 대해서 ‘공산주의’라고 표현할만큼 혐오했습니다. 자기들의 미래가 될 선수들이 돈 없는 하위 팀으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여러 논쟁 끝에 마지막까지 반대한 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뿐이었고 과반수로인해 현재의 드래프트 제도가 정착이 됩니다. 때는 1965년 6월이었습니다.
-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Major_League_Baseball_draft
: Baseballlibrary.com